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도연맹 학살 사건 (문단 편집) ==== 학살의 명령과 지휘계통 ==== >"6월 27일 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지시를 직접 받았다. >---- >당시 헌병대 6사단 상사 김만식의 [[http://www.ohmynews.com/NWS_Web/View/at_pg.aspx?CNTN_CD=A0000420451|증언]] >남한 군경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북한 방송의 보도는 과장됐지만 사실이다. 전쟁 초기의 학살 명령을 최고위층(Top Level)이 내렸다는 건 의심할 바 없다. >---- >미군 소속 에드워드 중령의 기록(1951.4.30) [[6.25 전쟁]] 중에 수도 [[서울특별시|서울]]을 탈출하여 [[부산광역시|부산]]으로 피난 갔던 [[이승만]] 은 '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.'는 보고를 받는다. 그러자 [[이승만]] 은 "그 [[빨갱이]] 놈들은 역시 배신자였어!"를 외쳤고,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 확보하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게 되는데 여기서 가장 주동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[[김창룡(군인)|김창룡]]이다. 이승만이 CIC 특무 헌병대장 김창룡에게 지시하여 '[[조선인민군]]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'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.[* 한편 일부에선 상부에서 내려온 일명 [[빨갱이]] 처리를 위해 지역 내 '빨갱이' 숫자를 무슨 수단으로든 채우고 보고해 상부의 포상을 노리거나, 재산 몰수를 위해서 살상하기도 했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고도 한다.] 이승만은 이에 대해 하와이 현지에서 사망전까지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유족들이나 국민들에게 사과나 언급을 한적이 없었으며, 그의 외국인 배우자였던 프란체스카 역시 한번도 이에 대해 사과나 언급조차 하지 않고 사망하였다. 상부에서 처단 명령이 하달되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예비검속[*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어떤 상황에 대비해 사람들을 구속하는 행위다. [[일제강점기]] 시대에 생겼다.]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하였다. 일부는 교도소로 보내고, 일부 인원은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하기도 했으며, 일부 인원은 이승만과 같은 이씨 종친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.[* 진실화해위원회 2009 하반기 조사보고서, 752쪽.]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인원은 군경이 유치장이나 마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차례대로 트럭에 실어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총살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